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의 성패가 전력과 용수 등 기반시설 확보 여부에 달려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정부가 관련 인프라 사업의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잇달아 면제하며 속도를 내고 있다.
정부는 지난달 25일 국무회의에서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의 용수 인프라 구축 사업과 서남권 반도체클러스터 조성을 위한 6조원 규모 통합재정지원 사업의 예타를 면제했다. 이어 이달 1일에는 전력 공급망 구축 사업의 예타도 면제했다. 이로써 반도체 산단 조성의 핵심 난제로 꼽혀온 전력·용수 인프라 구축 사업이 모두 예타 면제 대상이 됐다. 통합재정지원 사업은 2027년부터 2030년까지 총 6조원을 출연해 기반시설 확충과 전·후방 산업생태계 조성, 인력 양성 등을 지원하는 내용이다. 여기에 한국전력이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향후 전기요금을 미리 받아 송·변전망 건설에 투입하는 ‘전기료 선납’ 방안(약 25조원 규모)도 함께 논의되고 있으나, 참여 여부와 정확한 금액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다만 예타 면제는 행정절차를 단축하는 것일 뿐, 실제 전력·용수 공급 능력이 확보됐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산업통상부가 제시한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소요 인프라는 전력 6.3기가와트(GW), 용수 하루 65만t, 부지 160만평, 팹 직접 근무 인력 3만명 규모다. 정부는 2030년 6월 첫 양산을 목표로 2029년까지 약 3GW의 전력을 우선 공급해야 하는 상황이다.
용수: 남아있는 여유가 없다
국민의힘 김위상 의원이 기후에너지환경부·전력거래소 자료를 분석한 결과, 과거 호남에서 백지화된 댐 6곳(구례 내서댐, 화순 동복천댐, 순창 적성댐 등)의 하루 용수 공급 규모가 69만t으로 필요량을 웃도는데도 이를 백지화한 전례가 있으며, 실제 여유 용수는 주암댐·장흥댐 일부를 제외하면 사실상 거의 없는 수준이라는 반박이 나왔다. 전문가들도 “광주·전남권은 한강 수계처럼 대규모 광역상수 체계가 촘촘하게 구축되지 않았고 계절별 편차도 크다”고 지적한다.
이런 우려는 현재 진행 중인 가뭄으로 더욱 현실화되고 있다. 기록적인 폭염과 짧은 장마로 남부지역 가뭄이 장기화하면서 행정안전부는 지난달 14일 기존 ‘관계부처 합동 가뭄 TF’를 확대해 ‘남부지역 가뭄 대응단’을 신설했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의 주요 상수원인 동복댐 저수율은 48.94%까지 떨어졌고, 누적 강수량은 지난해의 42% 수준에 그쳤다. 섬진강댐 저수율도 급락하면서, 향후 광주·전남의 산업용수 수요가 늘어날 경우 전북 동진강 유역의 농업용수 확보와 이해관계가 충돌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도 나온다. 실제로 나주호 농업용수 일부를 산업용수로 전환하면서 부족해지는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한 ‘신북지구 농업용수 공급사업’도 별도로 예타를 면제받았는데, 이는 산업용수 확보가 농업용수 부족이라는 부작용을 이미 낳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전력: 재생에너지·ESS만으로는 한계
전력 문제도 마찬가지다. 호남권 태양광 출력제어량은 2021년 35메가와트시(MWh)에서 지난해 8만3944MWh로 2400배 가까이 급증했는데, 이는 발전 자체는 늘고 있지만 송전망·변전설비 등 계통 인프라가 이를 받아내지 못해 ‘버려지는’ 전력이 늘고 있다는 뜻이다. 태양광·풍력은 일조량과 바람에 따라 출력이 좌우되는 간헐성을 가진 데다 이용률도 15~25% 수준에 그쳐, 설비용량만큼 전력이 안정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재생에너지 ‘단독’으로는 반도체 팹이 요구하는 24시간 무중단 전력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게 업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정부가 전력 변동성 대응책으로 제시하는 에너지저장장치(ESS) 역시 보조 수단에 그친다는 지적이 나온다. ESS는 전기를 만드는 장치가 아니라 저장해뒀다 방출하는 장치로, 통상 30분에서 길어야 8시간 안팎의 방전 지속시간을 기준으로 설계돼 재생에너지 출력 변동을 완충하거나 첨두부하에 대응하는 역할에 그친다. 정부는 재생에너지 과잉발전으로 계통 안정이 시급한 호남권에 2026년까지 ESS 1.4GW를 우선 조달하기로 했지만, 이는 클러스터가 필요로 하는 6.3GW의 일부 변동성만 흡수할 수 있는 규모여서 24시간 기저전원을 대체하기엔 역부족이라는 평가다.
원전: 유일한 기저전원, 그러나 용량은 빠듯
서남권에서 안정적 기저전원 역할을 할 수 있는 발전원은 사실상 전남 영광군의 한빛원자력발전소가 유일하다. 한빛원전은 국내 원전 중 유일하게 서해안·전라도에 위치하며, 현재 상업용 원자로 6기가 가동 중이다. 총 설비용량은 약 590만kW(5.9GW)로, 대한민국 전체 전력 생산량의 약 6%를 담당한다. 그러나 이 설비용량은 클러스터가 필요로 하는 6.3GW와 거의 맞먹는 수준이어서, 한빛원전 전체를 반도체 클러스터에만 투입한다고 가정해도 빠듯하고, 기존 호남 지역의 전력 수요까지 고려하면 명백히 부족하다.
이에 정부는 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반도체 클러스터·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수요 증가에 대응해 한빛·울주 등 추가 원전 건설 여부를 검토하기로 했다. 서남권(6.3GW), 용인(15GW), 전국 AI 데이터센터(8GW)를 합친 확정 전력 수요만 30GW에 육박하는 만큼, 대규모 기저전원을 무중단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는 원전 확충이 불가피하다는 게 정부와 업계의 판단이다. 다만 신규 원전은 통상 건설에만 10년 이상이 소요돼, 2030년 양산이라는 정부 목표와는 시차가 크다는 지적도 나온다.
해외에서도 확인되는 흐름
전력 수요발 원전 회귀 흐름은 해외에서도 나타난다. 세계 최초로 탈원전을 선언했던 이탈리아는 지난 6월 하원에서 원전 재가동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우크라이나·이란 전쟁의 영향과 함께 AI 확산에 따른 전력 수요 폭증이 배경으로 꼽힌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원자력은 에너지 주권과 탈탄소, 일자리와 경쟁력을 책임지는 핵심”이라고 밝혔고, 탈원전을 추진했던 독일 메르츠 총리도 “탈원전 결정이 후회스럽다”고 언급했다. 대만에서도 엔비디아 젠슨 황 최고경영자가 정부에 탈원전 재고를 공개 촉구하며 원전 수명 연장 법안이 통과된 바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