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세우며 살아온 다니엘 뉴먼
지난 8월 23일 오후 5시. LA기쁨의교회 예배당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였다. 아주사퍼시픽대학교(APU)에서 스물두 해를 보낸 다니엘 뉴먼 교수의 은퇴감사예배였다.
제자들은 한결같이 같은 말을 했다. “선생님의 가르침은 교수의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담긴 사랑의 가르침이었습니다.”
APU를 졸업했지만 뉴먼 교수의 수업을 들어본 적 없는 이희문 목사도 그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축복받은 자들입니다.”
예배가 끝난 뒤 뉴먼 교수는 아내와 딸의 말을 전했다. “아내와 딸이 ‘아빠는 이날 모인 분들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오히려 나 자신이 축복을 듬뿍 받아서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성(姓)을 빗대 농담을 건넸다. “이제 은퇴했으니 뉴맨(Newman)이 아니라 올드맨(Oldman)이 됐습니다.”
그 웃음 뒤에는 스물두 해의 시간이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옆에 있던 부인 고혜자 사모도 같은 감사를 전했다.
“은퇴감사예배를 제자들이 마련해주셔서 많이 감사했습니다. 예배 시간 남편의 은퇴를 기쁨으로 축복하며 축하해주는 모든 분들의 모습은 잊지 못할 것이에요.”
한 번도 강단에 올라가 본 적이 없었던 사모였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감사의 표시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사회자 목사가 단상에서 한마디 하라고 권유했을 때, 그는 흔쾌히 응했다.
1960년 9월 20일. 미국 아칸소주 페이엣빌에서 한 소년이 태어났다.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코비나 노스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주사퍼시픽대학교에서 종교학을 전공했다.
청년 시절, 그는 YWAM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다. 원래 꿈은 섬나라로 떠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그를 한국으로 이끌었다. 한국에서 그는 9년을 살았다.
기독교신학대학원(현 백석대학교)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1993년 7월 서울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동시에 선교사로 공식 파송을 받았다.
서울 구로구 임마누엘장로교회에서 이주노동자 사역 목사로 섬겼다. 구로공단 일대의 공장 노동자들에게 목회적 돌봄과 사회적 지원을 제공하는 날들이었다.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은 그에게 한 사람을 허락하셨다.
1984년 10월 27일, 고혜자 사모와 결혼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뒤 열린문한인장로교회와 충현선교교회에서 사역했고, 풀러신학대학원에서 문화교류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는 한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했다. 논문의 제목은 “Uri as Contextual Theology for the Korean Church and Its Mission”이었다.
그는 한국 문화의 ‘우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 택시를 타면 기사가 별의별 질문을 합니다. 손님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과의 공통점을 찾으려는 시도입니다. 하나라도 공통점이 발견되면 목적지까지 이야기가 이어지고, 없으면 대화가 단절됩니다. 예전의 한국 인간관계는 ‘님’과 ‘야’로 나뉘기도 했습니다. ‘님’은 나보다 높은 사람, 잘 보여야 하는 사람. ‘야’는 나보다 낮은 사람, 하대해도 되는 사람.”
슬하에 두 딸이 있다. 장녀 조이 브래들리는 남편 매튜와의 사이에 세 자녀를 두었고, 차녀는 안젤라 뉴먼이다.

APU 교수 사역의 시작은 기대보다 고민이 앞섰다. 당시 그는 LA예본교회에서 담임목회를 하고 있었다. 교회와 대학을 동시에 감당해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
“처음 APU에서 강의를 시작했을 때 고민이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양들을 잘 먹이지 못할 것 같았고, 그렇다고 학교에서 교수 사역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마음은 교수직을 내려놓고 목회에 전념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그는 혼자 결정하지 않았다. 교우들을 모아놓고 함께 기도하자고 요청했다. 기도 후 교우들의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저희가 목사님을 붙잡아 놓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을 놓아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은 학교에서 목사들을 양성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그 말이 전환점이 되었다. 뉴먼 교수는 교우들에게 부탁했다. “예본에서 받은 훈련을 다른 교회를 위해 힘써 달라.”
교우들은 각자의 자리로 흩어져 섬겼고, 나중에 그는 이런 말을 들었다. 그들이 섬기는 교회로부터 받게된 말이었다.
“좋은 교인들을 보내주셔서 감사하다.”
한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각자의 자리에서 교회를 섬기는 제자들을 바라보며 그는 깨달았다. 목회와 교수 사역은 서로 다른 길이 아니었다. 하나의 사역으로 이어져 있었다.

스물두 해 동안 APU에서 그가 가장 큰 축복으로 꼽은 것은 학생들과의 만남이었다. 특히 아시안 프로그램 디렉터로 일하던 시절, 수강신청 때 학생들과 나누는 30분의 시간이 소중했다.
“보통 수강신청은 과목을 선택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하지만 APU에서는 학생과 마주 앉아 어떤 고민이 있는지 나누고, 기도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합니다. 그것이 교수와 학생이 동역자로서 교제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 학생의 기도제목을 한 학기 동안 기억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이 전통은 그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전임 박성민 교수가 세운 전통을 이어받았고, 나중에 변명혜 교수에게 인계했다. 변 교수 역시 그 전통을 이어갔다. 학생들과 만나 고민을 듣고 함께 기도하는 일은 단순한 교육이 아니라 목회적인 사역이었다.
고이삭 전도사는 이렇게 회상한다.
“영어권인 제가 한인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할 때 옷은 어떻게 입고 가야 하는지,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를 꼼꼼하게 알려주셨습니다. 그 만남이 지금도 소중하고 감사한 만남이었습니다.”
클라라윤 목사도 같은 시간을 기억한다.
“수강신청 때 뉴먼 교수님과의 30분은 멘토링 시간이었습니다. 사역과 가정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기도하는 영적인 교제가 이어졌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시간이 매우 소중했고 감사했습니다.”
공식적으로 은퇴했지만 그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은퇴를 했지만 아직 은퇴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학교 행정 업무가 남아 있고, 논문을 완성하지 못한 학생들의 지도도 계속되고 있다.
ANC온누리교회에서 협력목사로 섬기며, 집 근처 카말리오 열방교회에서는 Advising Pastor로 동역하고 있다. 그 교회에서 사역 요청이 들어왔을 때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한두 번 요청하고 그쳤다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함께하게 됐습니다.”
다만 이제는 건강도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나이가 들다 보니 몸도 불편해졌습니다. 지금은 건강이 회복되는 데에도 중점을 두려고 합니다.”
65세에 은퇴한 것에 대해 서운한 마음은 없다고 했다.
“내 몸이 계속 건강했다면 서운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음식 조절을 해줘야 할 정도로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아졌습니다. 적당한 시기에 은퇴를 하게 된 것으로 생각되어 전혀 서운하지 않습니다.”
은퇴 이후 그가 새롭게 품고 있는 사역이 있다. 지친 목회자들에게 한 달의 쉼을 주고 싶다는 것이다.
“미국 전역을 돌아보면 제자들을 비롯해 많은 목회자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특히 작은 교회에서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사역하면서 쉼을 갖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을 위해 사역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 달 정도 안식월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그분들이 한 달 동안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충전할 수 있도록 돕고, 그 기간 동안 말씀을 전하는 일도 구상하고 있습니다.”

교수라는 직함은 내려놓았지만 사람을 세우는 일은 끝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목회와 교수 사역 사이에서 고민했다. 교우들의 권유와 기도로 교수 사역의 길을 걸었다. 그 길에서 수많은 학생들을 만나 그들의 고민을 듣고 함께 기도하며 목회자와 지도자들을 세워왔다. 이제 그의 시선은 지쳐 있는 목회자들에게 향해 있다.
뉴맨이 은퇴했으니 이제는 올드맨. 그 농담처럼 세월은 흘렀다. 그러나 사람을 세우고, 다음 세대를 준비하고, 지친 이들에게 쉼을 주려는 마음은 여전히 그대로다.
스물두 해 동안 교실에서 제자들을 세워왔다면, 이제는 현장에서 지친 목회자들에게 다시 일어설 힘을 건네는 일. 그것이 다니엘 뉴먼에게 주어진 또 다른 시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