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반도체 800조, 알고 보니 ‘가이드라인’이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지난 6월 발표한 800조 원 규모 호남권 반도체 투자를 두고 재무적 부담과 지배구조상 절차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양사가 공시한 투자 규모와 일정은 ‘가이드라인’ 성격으로, 시장 상황과 경영 환경 변화에 따라 변동될 수 있다는 단서가 붙어 있어 현 단계에서는 확정된 투자 방침이라기보다 의향을 밝힌 수준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나 정부는 이미 사업이 확정된 것처럼 속도를 내고 있다. 정부는 올해 안 착공, 2030년 양산이라는 구체적 로드맵을 제시했고, 1단계로 팹 2기를 먼저 건설한 뒤 시장 상황에 맞춰 2기를 추가하는 단계별 확장안까지 공식화한 상태다. 이 때문에 사업 확정 여부를 둘러싼 정보 격차가 국민들 사이에 혼선을 낳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지난 6월 정부 발표 이후 온라인상에서는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결단이라는 의견과 시장 원리를 무시한 정치적 포퓰리즘이라는 의견이 첨예하게 맞붙었고, 정치권에서도 사업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이를 두고 한 반도체 전문가는 “반도체 팹의 규모와 증설 속도는 기업이 반도체 사이클을 고려해 판단해야 할 문제”라며 “2030년이라는 기한을 정해 놓고 사업을 밀어붙이면 조급함에 일을 그르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일본 구마모토현 TSMC 공장이 22개월 만에 준공된 사례를 들어 2030년 양산이 가능하다고 설명하는 데 대해서도, 구마모토는 이미 원전 등 전력 인프라와 소재·부품·장비 생태계가 갖춰져 있었던 반면 호남은 그렇지 않다는 반박이 나온다. 부지 지정과 정치적 발표가 먼저 이뤄지고 기업의 실제 투자 확정과 인프라 구축이 뒤따라야 할 사안인데, 정부 발표가 이 순서를 뒤바꿔 놓았다는 지적이다.
기정사실화되지 않은 이 사업에 재무적 부담을 더하는 것은 이미 진행 중인 용인 클러스터다. 삼성전자는 용인에 시스템반도체 팹 6기를, SK하이닉스는 인근 원삼면에 팹 4기를 조성 중이며 각각 2029년, 내년 초 첫 팹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아직 완공되지 않은 용인 클러스터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고 있는 상황에서 호남에 별도의 신규 팹까지 짓는 데 따른 부담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실제로 호남 투자 계획이 구체화되는 과정에서는 용인 클러스터 투자 계획이 일부 조정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돼 경기 지역에서 반발이 일기도 했다.
여기에 미국 정부의 투자 압박까지 겹쳐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지난 7월 마이크론의 뉴욕주 클레이타운 팹 콘크리트 타설 기념식에서 “나는 경쟁사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미국으로 불러와 생산 시설을 짓게 하고 싶다”고 밝혔고, 이달 초 블룸버그TV 인터뷰에서도 “미국에서 공사를 시작할 의향이 없다면 세계 최대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며 관세를 시사하는 등 압박을 재차 반복했다. 이는 지난해 11월 한미 양국이 서명한 3500억 달러(약 490조~501조 원) 규모 전략적 투자 양해각서(MOU)와는 별도의 요구다. 청와대는 기존 대미 투자 패키지 외에 반도체 분야에서 별도의 ‘중복 청구서’를 받을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으며, 이 경우 호남 반도체 메가프로젝트에도 부담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여기에 미국이 무역법 301조를 근거로 시행한 강제노동 관련 관세와 향후 추진될 과잉생산 관련 관세가 겹치면서, 산업통상부는 두 관세를 합산한 실효 관세율이 15%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미국 측에 전달한 상태다. 언론에서는 이를 관세·반도체·방위비에 걸친 미국의 ‘3중 압박’으로 표현하고 있다.
기업 내부 절차도 변수다.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이찬희 위원장은 호남 투자에 대해 준감위가 직접 관여할 사안은 아니라면서도, 대규모 반도체 투자는 정치적 요구가 아니라 입지·인력·전력·용수·공급망을 종합한 경영 판단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주주단체인 대한민국주주운동본부는 장기간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는 사업인 만큼 이사회 승인에 그칠 것이 아니라 주주총회 안건으로 상정해 주주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삼성전자 초기업노조는 조합원 84%가 호남 반도체 투자에 반대한다는 자체 설문 결과를 공개하며 재검토를 요구했고, 사측과의 미팅에서 “경영진도 부담스러워한다”는 취지의 입장을 전달받았다고 주장했다. 최근에는 고용노동부가 배치전환·근무지 변경을 노동쟁의 대상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지침을 내놓으면서, 신규 공장 인력 배치를 둘러싼 노사 갈등 변수까지 새로 떠올랐다.










